CEO논어학교 개설한 권혜진 서울숲양현재 학장

2023-08-28

[주간조선/23.08.28]



“나(我)라는 인간을 형성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책은 바로 ‘논어(論語)’다.”


삼성그룹 창업주 고(故) 이병철 회장의 자서전 ‘호암(湖巖)자전’에 나오는 말이다. 호암은 1985년에 쓴 자서전에서 자신의 독서습관을 소개하면서 “어려서부터 나는 독서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소설에서 사서(史書)에 이르기까지 다독이라기보다는 난독(亂讀)하는 편이었다. 가장 감명을 받은 책 혹은 좌우에 두는 책을 들라면 서슴지 않고 ‘논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고 ‘논어’를 자신의 애독서 가운데 단연 으뜸으로 꼽았다.


한국에서 으뜸가는 부(富)를 일군 이병철 회장의 생애는 지난해 인기를 끈 ‘재벌집 막내아들’이란 드라마를 통해서도 세간의 관심을 모은 바 있다. 이병철 회장의 이 같은 언급 때문일가? 요즘 재계와 출판계에 ‘논어’ 열풍이 뜨겁다. 논어는 춘추전국시대(기원전 770년~기원전 221년)에 활약했던 공자(孔子·기원전 551년~기원전 479년)와 그 제자들의 어록을 모아둔 책.


하지만 무려 2000여년 전에 중국 땅에서 일어난 일들을 다룬 ‘논어’를 주제로 지난 한 해 동안 국내에서 출간된 책은 50종이 넘는다. 업계 관계자에 따르면, 2017·2018년 한 해 평균 35권가량 출간되던 논어 관련 서적은 2019년 연간 40권을 돌파하더니 지난해 57권에 달했다. 한 달에 4.75권꼴로 ‘논어’를 주제로 한 책이 국내 서점가에 쏟아져나온 셈이다. 한 해의 절반이 조금 넘게 지난 올해 역시 논어를 주제로 출간된 책이 벌써 33권에 달한다. 이쯤되면 ‘논어 열풍’이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을 정도다.



이병철이 가장 애독한 책 ‘논어’

급기야 기업 최고경영자(CEO)들을 대상으로 한 강좌까지 개설되기에 이르렀다. 오는 9월 7일 첫 수업을 시작하는 ‘CEO논어학교’다. 김난도 서울대 교수가 대표 집필한 ‘트렌드 코리아’ 시리즈의 공저자로 시작해 리서치 및 교육분야에서 경험을 쌓은 권혜진 서울숲양현재(養賢齋) 학장(서울대 소비자학 박사)이 개설한 6개월 과정의 온·오프라인 병행 최고경영자 대상 강좌다.


강의는 2016년부터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논어 강좌를 병행하면서 ‘주역’ ‘한서’ ‘대학연의’ ‘태종실록’ 등의 고전을 잇달아 한글로 번역 출간한 이한우 논어등반학교 교장이 맡았다. 조선일보 문화부장 출신으로 필명을 날린 이한우 교장은 그간 ‘최인아책방’에서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한 논어 강의와 양현재에서 ‘이한우와 함께 읽는 논어’라는 영상강의를 해왔다. ‘양현재’는 ‘빼어난 인재를 키우는 집’이라는 뜻으로, 이한우 교장이 권혜진 학장에게 추천해 준 당호(堂號)다.


이 같은 입소문을 타고 오는 9월 7일 문을 여는 CEO논어학교의 문을 두드리는 C레벨급 임원들도 적지 않다. 한국무역협회를 비롯해 LG그룹, LS그룹 등 대기업 임원들의 수강신청도 이어지고 있다. 특히 무역협회 회장을 맡고 있는 구자열 회장(LS그룹 이사회 의장)은 그간 임직원들에게 이한우 교장이 쓴 ‘논어를 읽으면 사람이 보인다’는 책 등을 선물한 바 있어 각별한 관심을 갖고 있다고 한다. AI(인공지능), 로보틱스, 챗GPT 등이 경제뉴스의 1면을 차지하는 요즘 세태에서 분명 이례적인 현상이다.


‘트렌드 코리아’ 시리즈의 공저자와 LG전자 미래고객전략팀장으로 일하면서 최신 트렌드를 잡는 데 탁월한 감각을 선보인 권혜진 학장이 이 같은 현상에 주목한 것이다. 지난 8월 21일 서울숲이 내다보이는 ‘서울숲양현재’에서 만난 권혜진 학장에 따르면, 사실 논어를 기업경영과 최초로 접목시킨 것은 일본에서부터라고 한다.


‘일본 자본주의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시부사와 에이이치(澁澤榮一·1840~1931)가 ‘논어와 주판’(1927)이라는 책을 출간한 것이 시작이었다.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메이지유신 직후 약 500여개의 기업을 설립한 경영인이다. 한반도에서도 경인철도와 경부철도, 경성전기(한국전력의 전신) 사장을 지냈다. 논어로 상징되는 ‘유교(儒敎)’ 이념과 주판으로 상징되는 ‘자본주의’를 최초로 결합한 시도였던 셈이다. 논어를 토대로 이른바 경제인들이 국가 일원으로서 갖추어야 할 소양, 가치관, 돈과 일에 대한 철학을 논한 책인데, 일본·한국·대만 등 동아시아 국가들의 급속한 경제발전의 동력이 된 ‘유교 자본주의’의 시작을 알린 책이었다.


시부사와 에이이치의 ‘논어와 주판’

물론 유교 성리학을 국가지도이념으로 ‘공자 왈(曰), 맹자 왈’ 하면서 일본보다 높이 공자님의 말씀을 받들어 모신 조선으로서는 아쉬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시부사와 에이이치가 재정립한 ‘논어와 주판’의 영향 때문이었을까. 권혜진 학장은 “일제강점기 때 태어나 지금의 삼성과 같은 세계 굴지의 글로벌 기업을 만들어낸 이병철 회장을 비롯해, 구인회 LG그룹 창업주, 조홍제 효성그룹 창업주 등이 ‘논어’의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주는 언급과 일화는 한두 개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제2의 이병철, 구인회를 꿈꾸는 기업 임원진이라면 ‘논어’에 한번쯤 눈길이 갈 수밖에 없는 셈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어록으로 유명한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이란 말도 ‘논어와 주판’의 연장선상에 있다.


물론 공자와 그 제자들이 활동했던 춘추전국시대와 지금의 정치환경, 경영환경은 판이하게 다르다. 하지만 “어느 시대가 됐든 일은 사람을 통해 하기 마련”이라는 것이 권 학장의 주장이다. 권 학장은 “춘추전국시대까지 갈 것도 없이 리더가 직면하는 상황은 작년과 올해가 다르고 어제와 오늘이 다를 수 있다”며 “사안에 대한 공부와 사람에 대한 공부를 구별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에 CEO논어학교에는 최신 트렌드를 반영한 별도의 ‘심미안(審美眼)’ 수업도 병행할 예정이다. 장쩌민, 후진타오 등 전 중국 국가주석과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일본 총리 등이 찾아 유명해진 ‘제주 생각하는 정원’의 성주엽 실장(성범영 대표의 아들), 최근 ‘창조적 시선’을 출간한 문화심리학자 김정운 교수, ‘심미안수업’의 윤광준 작가, 본업인 미학평론뿐 아니라 정치평론가로 활발히 활동 중인 진중권 광운대 특임교수를 별도로 초빙해 특강을 듣는 것. “논어와 심미안은 둘 다 결국 안목 공부고, 더 나은 쪽으로 생각하게 해주고 일을 실패할 확률을 줄이는 공부”라는 것이 권 학장의 설명이다.


권혜진 학장은 “공자의 가르침은 뒤죽박죽되고 혼란스러운 기본을 제대로 장착하게 해주고 조직 구성원들과 공유할 수 있는 언어를 제공해 준다”며 “논어는 조직을 유능하게 만드는 소프트웨어 플랫폼”이라고 말했다.



이동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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